첫번째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순간 이 책의 정체성이 헷갈렸다.
분명히 소설집인데 화자의 상황이 자꾸 작가와 겹치는 거였다.
살림에는 재주도, 의욕도 없지만 손 야물고 마음 고운 사촌동생 덕에 손님 치르는 일이며,
명절을 남 부끄럽지 않게 치뤄내면서 그만큼 섭섭치 않게 대우해 주려고 맘을 써가는 모습이.
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다.
홀로 또는 부부가 함께 늙어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일상이 스스로 그 세월을 살아온
작가의 혜안으로 부드럽게, 때로는 예리하게 풀려나온다.
그 중에서도 [거저나 마찬가지]에 묘사된 주인공의 선배 언니의 묘사는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의
이중성을 할 말 없게 내보여준다.
대학물 먹은 사람으로 공단에 위장취업해서 노동자를 위해 투쟁한다고 자부하는 그녀는,
다른 직원들과는 달리 자신이 이 상황을 선택했다는 생각으로 우월감을 유지하고,
못 배웠으나 눈썰미 좋고 바지런한 주인공의 남편을 속으로 무시하며,
주인공의 글솜씨를 좋은 말과 소소한 보수로 유용한다.
[마흔 아홉살]의 부녀회 모임에서 벌어지는 뒷담화는 섬뜩함을 느끼게 할 정도이고,
[대범한 밥상]에서 친구들은 불행을 당한 친구를 위로하려 하면서도 그녀 주변의 변화를
돈과 결부지어서 소설을 만든다.
읽어가면서 몇 번을 뜨끔거렸던가...
하지만 작가의 목소리는 네가 틀렸다며 그악스럽게 악다구니를 쓰지 않는다.
나즉한 목소리로 어쩔 수 없었다고, 그럴 수도 있는거 아니냐면서 어찌 보면 포용의 미학을,
아니면 쉬운 포기처럼 이야기한다.
30대의 팔팔한 금자씨는 시원하게 복수의 칼날이라도 휘둘렀지만,
오남매를 잘 키워낸 복희씨는 문갑 깊숙한 곳에 시꺼먼 약 한갑을 보관하고 있다.
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.
해가 지나면 나이테를 하나씩 더해가는 그늘 풍성한 나무가.
계절이 바뀌면 잎도 떨구고, 비바람에 가지를 예민하게 흔들지만 그 중심을 잃지는 않고
포근하고 든든하게 서 있고 싶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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